https://www.etoday.co.kr/news/view/1893789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어디에선가 나는 한숨지으며 이야기할 것이다. 숲속에 두갈래 길이 있었고 나는 사람들이 적게 간 길을 선택했다고. 그리고 그것이 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고’

수많은 선택의 갈림길에 설때마다 되새겨온, 미국 작가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의 마지막 문장이다.

원제 ‘The road not taken’은 가지 않은길, 가지 못한길, 가보지 않은길, 걸어보지 못한길 등으로 번역할 수도 있는데 그간은 ‘가지 않은길’로 주로 알려져 왔다면, 코로나19가 가져온 이 미증유의 시대를 보내며 ‘걸어보지 못한 길’로 이제 제목을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문득 생각해본다.

오가던 거리에서 서로 몇 번을 스쳐 지나갔는지 알 길 없는, 마스크로 온통 가려진 얼굴들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던 오랜 속담을 무색케 하고, 서로 직접 얼굴 한번 본적 없이 디지털 프레임 속에서만 안부를 묻고 강의를 듣고, 평생을 함께 해온 가족의 마지막 죽음의 순간도 함께 하지 못한 채, 수십년간 가족의 안위를 책임져온 직장이, 사업체가 어느 순간 신기루처럼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속에서 앞으로 어떤 생존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지 짐작도 쉽지 않은, 한번도 걸어가보지 못한 낯선 길 앞에 서 있기 때문이다.

전 세계가 어떤 영화의 한 장면보다 더 극적인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요즈음,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와 영화 ‘매트릭스’가 겹쳐져 떠오른다.

프랑스의 대표적 실존주의 작가인 알베르 카뮈가 소설 ‘페스트’에서, 전염병이 창궐하는 폐쇄된 도시, 죽음이라는 극한의 절망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인간의 불굴의 의지와, ‘함께 하는 연대’라는 희망에 대해 얘기했다면, 영화 ‘매트릭스’는 인간의 기억마저 AI에 의해 입력되고 삭제되는, 진짜보다 더 진짜같은 가상 현실의 세계인 ‘매트릭스’ 속에서 진정한 현실을 인식할 수 없게 재배되는 인간들에 대한 얘기다.

‘매트릭스의 릴리 워쇼스키 감독은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들리야르의 ‘시뮬라시옹’ 책을 배우들에게 주면서 필독하게 했다는데 ‘시뮬라시옹(simulation)’은 ‘실재가 가상 실재로 전환되는 일’ 즉 넘쳐나는 가상 이미지들의 확산으로 인해 진짜들이 사라져버린 상황을 뜻하는 개념이다.

1947년에 출간된 소설 ‘페스트’를 2020년에 다시 읽어보면서 인간이 함께 연대해가는 것이 70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얼마나 가장 중요한 희망인지, 1999년에 개봉된 영화 ‘매트릭스’를 지금 다시 플레이해보면서 앞으로 닥쳐올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어떻게 상상해야할지를 20년 전 영화에서 보여주고 있다는게 놀랍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는 진짜보다 더 진짜같은 가상의 실재, 눈으로는 볼 수 없었던 것들의 존재가 새로운 세상의 주인공이 될지 모른다.

20년 후 쯤, 어느날 아침에 눈을 뜨면, 미리 세팅돼 있던 프로그램 중에서 원하던 형태의 하루를 각자 선택해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고, 버튼을 하나씩 누를 때마다 행복과 사랑이 즉각 배달돼 올지도 모른다. 또한 하나의 거대한 가상공화국으로 편입된 전 세계의 국가란 형태는 전부 소멸의 길을 걸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전 세계에 한류 붐을 일으킨 문화강국의 주인공이다. 이러한 창의적 강점으로, 진짜보다 더 진짜같은 가상의 실재, 눈으로는 볼 수 없었던 것들의 존재가 새로운 세상의 주인공이 될지 모를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산업적으로도 리드해나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 중에서도 창의적 계산과의 싸움에서 많은 승패가 엇갈리는 영화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단지 흥행의 운이 아니라 시대적 특징을 파악해내는 기획력,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가상의 인물, 그 인물들간의 관계, 모든 사건과 장소, 모든 촬영의 포인트들을 수천번, 수만번 철저히 계산한 가상의 세계를 마치 진짜인 것처럼 만드는 것이 영화이기 때문이다.

앞서간 많은 헐리우드 SF영화들이 미래 사회를 많이 예측해낼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 미래를 담아낸 헐리우드 SF영화들을 보면 대부분 거대 집단이나 소수의 권력층에 미래는 거의 독점당하고 공동화된 거리에 사람들의 물결과 상점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단지 영화적 상상력이라 생각했던게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점령당한 현재의 황량한 도시를 보면 이렇게 현실적으로 다가올 수가 없다.

20년 후를 대비한 5년 단위 미래 비젼 TF 팀에 미래를 연구한 과학자가 아니라, 미래를 미리 설계해본 영화인들을 기용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번도 걸어보지 못한 길’은 그간 사람들이 적게 걸어간 길을 선택해온 사람들의 적응력이 훨씬 높을지 모른다. 보이지 않는 길을 힘들게 헤쳐나온 사람들의 두려움이 훨씬 덜하고, 한번 실패의 리스크를 겪어본 사람들의 생존 방어력이 훨씬 강하다는 게 느껴지지 않는가.

지금 당장은 긴급자금들을 푸는 것으로 당분간 연명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소설처럼 상상하고 영화같이 창의적으로 계산하지 못한다면 미래는 우리의 것이 될 수 없을지 모른다. 문화강국에서 산업강국으로까지 도약할수 있을지를 소설 ‘페스트’가 70년 전에 이미 화두를 던진 것처럼 함께 고민하고 연대해야 할 절대절명의 시기다.

지금 내 눈앞에 절망감에 가득찬 눈빛으로 앉아 있는 상대방의 마음을 한번 상상해보라.

연대의 시작은 여기서부터다.